월간 영레이디 1987년 5, 6월호 jms 정명석 목사 기사의 진실

 

인터넷을 떠도는 1987년 6월호 영레이디 기사 글
인터넷 사이트와 블로그 상에 떠돌아다니는 1987년 6월호 월간 영레이디(중앙일보사) 기사 글

인터넷 상에는 <87년 6월 호 여대생 폭로기사>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의 여러 게시글이 아직도 떠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인 한 여대생이 애천교회현 기독교복음선교회에 빠져들게 되어, 이 곳에서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나중에는 정명석 목사에게 추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여대생 본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서술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비윤리적인 정명석 목사를 지탄하고 이에 맞는 사회의 관심과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추악하고 비윤리적인 교주로 묘사되고 비춰지는 정명석 목사의 모습은 지금의 변화된 사회와 세태 속에서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큰 충격을 받게 합니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당시 글을 접한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씩 변형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이 게시물의 원 출처는 중앙일보사에서 1987년도 6월에 발행한 <월간지 영레이디>입니다.

영레이디 창간호 표지
영레이디 창간호 표지(1981년 9월 창간호)

실제로 해당 기사가 게재된 <월간 영레이디>가 서점가에 배포되고 며칠 안되어, 서점에서 일하며 본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광주 지역 회원이 충격을 받고 힘들어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그 때 당시의 정명석 목사 설교 중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요번 광주에서 한 회원이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은 서점에 있는 사람인데 교회에 잘 나오고 열심히 하다가 ‘영레이디’를 보고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번 순회 집회에는 일단 나오겠다고 했는데 나왔습니다”
  • 그 이야기를 듣고 첫날 집회 때에 그 일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래도 문제가 안 풀렸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자기네 집에 누가 또 책을 몇 박스를 들여놓으러 왔을 때 물었답니다.
  • “내가 영 레이디에 나온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데 이런 사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했더니만
  • “뭘 그런 것을 진짜로 믿느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책만 팔면 됐지 뭘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을 따지느냐? 기자들이 한소리를 가지고… ”
  •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아니고 다 그게 책을 팔아먹기 위한 작전이 아니겠느냐?
    아니 책장사가 그것을 모르면 되느냐?
    책장사가 눈치가 빨라야 되지 않느냐?
    요새 제대로 책을 쓰면 그게 팔립니까?
    눈꼽만한 것만 보면 100배 200배 300배 400배 확장을 시켜야 되지 않겠느냐?
    그것도 몰랐느냐?”
  • 그 소리를 듣고 이튿날 집회 때,  “선생님, 좋은 소식을 전해 주겠습니다.”
  • “무슨 소식?”
  • “자기네들이 조작했다고 직접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 “사실상 그 책(월간지)에 나온 그 인물이 지금 우리 교회에서 얼마나 열심히 다니는 줄 아느냐?”
  • 아무튼 서점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니까 알고 보면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실족한 사람만 억울한 것입니다.

1987년 6월 14일 주일말씀(하늘을 기쁘게) 중

이후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정명석 목사는  <영레이디>에 기사를 기고한 주치호 작가를 만나게1987년 7월 4일 됩니다.

주치호 작가는 영레이디 기사가 어떻게 쓰여지게 되었는지 원고 청탁 과정과 현대종교 탁명환 소장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기사가 작성된 것임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아울러, 진실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약 3개월간 본인이 직접 밀착취재를 하였는데, 자신이 기사화 한 내용이 터무니 없는 내용이었고, 탁명환 소장이 제공해준 자료 역시 잘못된 것임을 취재 중에 알게 됩니다.

이후 주치호 작가는 본인의 행동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월간지 마드모아젤 87년 10월호>에 정명석 목사와 낙성대교회를 소개하는 기사를 기고해주었습니다.

월간 마드모아젤 1987년 10월 호, 주치호 작가가 기고한 정명석 목사와 낙성대교회에 관한 기사
월간 마드모아젤 1987년 10월 호 표지사진(좌), 주치호 작가가 기고한 정명석 목사와 낙성대교회에 관한 기사(우)

그리고 10여년 뒤, 김도훈가명 비롯한 안티 세력의 활동이 계기가 되어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제작되던 당시,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면 정명석 목사가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인지하고 이에 본인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는 판단하에* 해명서1999년 3월 15일 작성를 작성하여 그가 무고하다는 것을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1987년 5,6월 월간 영레이디 기사에 대한 주치호 소설가 해명서 전문, 정명석 목사
1987년 5,6월 월간 영레이디 기사에 대한 주치호 작가 해명서, ⓒ 정명석.COM

해명서
주소 서울시 서초구 *** 호
성명 주치호(1939년 9월 26일생)
주민등록번호 390926-***

본인은 지난 1987년 5월, 월간지 영레이디 6월과 1987년 9월 월간지 마드모아젤 10월호에 기고한 바 있는 소설가입니다.
2회에 걸쳐 정명석 목사와 교회에 관해 기사를 쓰게 된 경위를 해명하고자 합니다.
당시 본인은 여성동아, 여원, 주부생활, 영레이디, 마드모아젤, 월간 전통문화, 정경문화 등 월간지 기고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레이디 월간지 공영O기자(현 중앙일보 소사장)로부터 종교계에 관한 기사를 기고해 주도록 청탁을 받았습니다. 본인이 『한국 교회 이래도 되는가』제목의 단행본을 도서출판 正友에서 출간한 바 있고,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관계로, 원고청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월간 현대종교 발행인 탁명환(작고)씨를 만나 자료요청을 하였던바, 녹음테이프와 취재메모를 제공받아, 이를 재료로 하여 취재를 했습니다. 탁명환 발행인이 제공한 취재메모를 요약하면 정명석 목사가 여성신도인 여대생을 성희롱하였으며-금품갈취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녹음테이프에는 성희롱 피해 여대생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보를 근거로 하여 피해자 면담을 여러가지로 시도해 보았으나 만날 수 없었고, 가해자 정명석 목사를 인터뷰하려고 했으나 만날 수 없었습니다.
원고마감일이 당도하여 탁명환 발행인을 만나 이러한 애로사항을 얘기한바 이미 월간지 현대종교에서 직접 취재를 했던 사항이고, 취재자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 안수자 최진O씨였습니다. 당시 최목사는 월간 현대종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목사를 취재원으로 하여 기사를 쓰게 됐습니다.

영레이디 월간지에 기사가 게제되자 피해 여대생이 잡지사를 찾아와 조작된 기사임을 항의했고, 정명석 목사 역시 잡지사를 방문하여 허위기사임을 주장하였습니다. 필자 본인은 기사 게재 경위와 월간 현대종교의 자료를 제시하고 진실여부를 취재할 수 있도록 3개월의 기간을 주도록 요구했던바 정명석 목사가 허용을 했습니다.

본인은 3개월에 걸쳐 밀착취재를 했습니다.

첫째 정명석 목사의 교리가 이단인가
둘째 여대생 신도에 대해 성희롱이 사실인가
셋째 교회운영에서 금품갈취가 있었는가

이상 세가지 사항에 대해 갖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취재에 나섰습니다.
우선 변장을 하고서 일요예배, 토요일모임, 체육회 행사에 참석하여 설교와 헌금에 대해 정밀 분석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사생활에 대한 취재에 나서 일거수일투족을 정밀 감시했습니다.

그 결과, 정명석 목사의 설교와 예배에서 이단요소가 없었고 성경을 중심으로 정상적인 선교활동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또 성희롱 피해 여대생은 완전히 조작된 것임이 확인이 됐습니다. 즉 교회를 떠난 여학생들이 현대종교 탁명환 발행인을 찾아와 허위 증언을 했던 것임을 탁명환 발행인이 인정을 했습니다.
또 교회 헌금은 여타 교회와 달리 강요를 독려하는 일이 없으며 극히 자율적인 것이었습니다.

3개월의 취재를 마치고서 본인이 정명석 목사를 찾아가 취재결과를 제시하고 영레이디 월간지 게재 기사가 오보였음을 사과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월간지 마드모아젤 주간 김정O이 인지하고 기사화 해 줄 것을 원고청탁을 했습니다.

본인은 정명석 목사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그간의 경위를 기사화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체 월간지에 원고를 쓰는 일을 포기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은 소설가로써 양식을 가지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기록했음을 해명해 드리는 바입니다.

1999년 3월 15일
상기 주치호

1987년 5,6월 월간 영레이디 기사에 대한 주치호 소설가 해명서 전문(TEXT)

<영레이디> 기사가 정식 취재가 아닌 현대종교 탁명환 소장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쓰여지다보니, 현대종교에서 83년도 이후로 지속적으로 본 선교회와 정명석 목사를 이단시하며 비판했던 대부분의 요소가 이 글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가르침을 받다보니 목사였던 인자하신 아버지가 ‘위선의 이중인격자’로 보였다(현대종교 83년 12월호)
  • ‘97년 7월 14일이 되면 재림주가 되어 심판할 것이다’ (날짜만 다름, 현대종교 83년 12월호)
  • 1일 생활 수준표’ 언급 (현대종교 83년 12월호)
  • 방언, 방서, 초혼, 입신, 천사와의 대화를 해보고 싶은 충동(현대종교 83년 12월호)
  • 교주는 총각이고 미남, 당시 자신에게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선(현대종교 84년 9월호)
  •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현대종교 84년 9월호)
  • 면담 중에 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를 당했다 주장(아우슈비츠에서 아이히만에 의해 유대인이 6백만명씩 학살되었던 것도 도덕과 윤리가 망각되어 그랬듯이, 그때도 그러했다.)(현대종교 84년 9월호)
  • 정명석 목사 약력, 통일교 영향 (현대종교 83년 12월호)

영레이디 기사에 담긴, 현대종교에서 정명석 목사와 본 선교회를 비판했던 요소들

탁명환 소장이 주치호 작가에게 제공한 취재자료는 이미 3년전인 1984년에 월간 현대종교를 통해서 기사화1984년 9월호 된 바 있습니다. 문제는 해명서에서도 밝혔듯이 탁명환 소장이 제공한 자료의 진상은 결국 허위이고 탁명환 소장 또한  이를 시인 했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이에 대한 해명이나 문제를 바로 잡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비판 요소들은 10여년이 흐른 후 김도훈과 본 선교회 안티 세력에 의해 고스란히 이용되고 수집되어 방송, 인터넷을 통해 여론화되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2009년 정명석 목사의 재판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영레이디 사건이 일어난 직후, 정명석 목사는 의연하게 대처하며 상대를 탓하기 보다는 종교인,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보다 흠 없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가기를 역설하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주치호 작가를 만났을 때에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곧고 바른 신앙관을 높이 보며 인정 해주었고 이후로도 여러번 그와 만나며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탁명환 소장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명석 목사는 현대종교지의 <본 선교회와 정명석 목사에 대한 비판기사> 문제로 과거부터 수차례의 만나게약 18회 되었는데, 기사 문제와는 별개로 나중에는 탁명환 소장과 형 동생 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게 됩니다.

94년도에 탁명환 소장이 사망 했을 당시에도 생전에 그와 더 잘 지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를 설교 중에 토로하기도 하였고 탁명환 소장 또한  정명석 목사에게 “내가 책임질테니 장로교 간판 달고 하면 어떻겠냐. 왜 사람들한테 이단 소리를 듣게 하느냐”고 말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 중에 제일 되는 계명’신약성서 마태복음 22장을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 정명석 목사와 본 선교회 회원들은 <제기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거나 이를 바로잡지 못한> 이들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의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일찍이 기원 전,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는 그들의 작품들에 나오는 루머의 여신 파마(Fama)아이네이스 변신이야기를 통해 근거없는 소문, 루머의 폐해를 놀랄만큼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아이네이스 속 루머의 여신 파마(Fama), 목판화. 세바스찬 브랜트 (Strassburg, 1502)
아이네이스 속 루머의 여신 파마(Fama), 목판화. 세바스찬 브랜트 (Strassburg, 1502)

루머의 여신 파마(Fama)는 오래된 이야기속의 등장 인물이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 곁에 여전히 군림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에 날개를 달고, 그녀의 집을 더욱 키워가고 있으며 누구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고 확산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 뿐만 아니라 이를 소비하는 ‘대다수의 우리들’이 더욱 현명한 판단과 책임감 있는 자세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이 정체불명의 괴물에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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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1개

  1.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이 시대… 가치관도 인간의 존엄성도 흔들리는 이시대… 양심이라도 살아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 요새도 사실관계를 확인않고 기사를 쓰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죠!
    한 번 기사화 되면 그 폐해는 걷잡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걸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3. 참 당한 사람만 억울하네요

    아니면 말고도 아니고

    피해주면 안되는거 아닌가 자극적으로 쓰기만 하면 다인지

    무책임하네요… 수많은 억울함을 이기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는게 대단하세요.

  4. 30년전 사실무근의 한 잡지 기사로 생명이 힘들어 했다니 속상합니다.
    제보자라고 하는 사람이 열심히 교회를 멀정히 다니는데도 만들어진 기사를 만드는 상술에 더이상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5. 1999년 이후의 정명석 총재 성추문에 관한 레퍼토리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거군요. 의료 관련 면담을 빙자하여 성추행을 한다는 둥, 통일교의 피갈음 영향을 받았다는 둥 하는 헛소리 말이죠.

    제가 파악하기론 이 시점을 기점으로 항간에서 근거없는 소문들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이후 모 인물을 중심으로 언론에 고발, 언론의 신용을 위시해 근거가 없음에도 의혹만으로 세간에 성추문을 기정사실화한 듯한데 그렇다면 이 사건은 이후의 성추문 고발의 진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치호 작가의 해명서라도 남아있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사실 해당 여대생의 해명이나 탁 소장의 해명이 남아 있는 문서가 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6. 주치호작가 같이 양심적인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알지만 자기 체면 때문에 말하지 않고 입다물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요. 그리고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기가 힘들듯 한번 쓴 기사는 다시 정정한다고 해도 다시 회복하기가 쉽지 않지요. 넘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겠어요

  7. 역시 뉴스는 신박해야 재밌고 흥미있게 보지요.그게 팩트가 아니어도 우선 말해보는 기자들이 있죠.
    우리나라 국민성이 가짜뉴스도 구분하며 정보를 대하는 태도가 나이지고 있으니 진실이 더 빛을 발할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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