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s 정명석 총재 설교 – 귀한 것을 진정 깨달아야 차원을 높인다 / 마태복음 16장 26절

정명석 총재 목사 수요 설교

jms 정명석 총재 2016년 1월 13일 수요 설교 :
귀한 것을 진정 깨달아야 차원을 높인다  / 마태복음 16장 26절

 

할렐루야!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의 평강과 성령님의 뜨거운 감동 감화 역사하심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생각>이 ‘어린아이 차원’이면 <행실>도 ‘어른 행실’을 못합니다. <생각>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행실>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생각>에서 주를 믿지 않으면 <행실>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차원을 높이려면, 먼저 <생각의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생각의 차원>을 높여야 <행하는 차원>도 높아집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차원이 높아지는지, 또 무엇에 대해 차원을 높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겠습니다.

배워서 지식으로만 일반적으로 알지 말고, 배운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배운 것을 확실하게 알려면, 깨달아야 합니다. <배워서 지식으로만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주>를 배워서 알았어도 깨닫지 못하면, 보통으로 믿고, 말씀을 들어도 보통으로 행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보통으로 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주>를 진정 깨달은 자는 100배, 1000배 차이 있는 삶을 삽니다. 고로 차원 높여 행하여 육도, 혼도, 영도 변화됩니다.

깨달아야 <생각의 차원>이 높아지니, <가치, 대하는 것, 보는 것, 행실의 차원>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고 귀히 쓰기 바랍니다. 깨닫지 못하면, <이 시대에 태어난 자기 육신>이 얼마나 귀한지 몰라 보통으로 보고 삽니다. <자기 육의 가치>에 대해 생각의 차원, 깨닫는 차원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면 기뻐하며 각자 개성대로 신나게 뛰고 달립니다. 또한 기뻐하며 희망으로 살면서 낙심하지 않고 세상을 이깁니다.

사람들은 흔히 “명예가다. 재벌이다. 권력자다. 스타다. 미인이다. 외모가 뛰어나다.” 하며 그런 것을 보고 가치를 매기며 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예, 재물, 권력, 외모… 그런 것 하나 없어도 <사람의 육신>은 그리도 귀하고 중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을 보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했습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육>이 죽으면, 다 끝나 버립니다. 명예·재물·권력이 있어도, 외모가 뛰어나도 <육>이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는 <자기 육>이 살아 있어야 꿈도 꾸고, 도전도 하고, 희망도 이루고, 얻고 쓰고 누립니다. <자기 자신>이 왜 그리 귀한지,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를 믿고,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를 사랑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고 주 말씀대로 행함으로 <자기 영>을 휴거시켜 ‘천국’까지 가게 하여 영원히 살게 할 수 있는 육이니 그리 귀한 것입니다.

인생 100년 사는데, 그나마 거의 70~90년이면 인생이 끝납니다. 그러니 ‘명예·권세·재물·인물’은 ‘영원한 것’에 비하면 귀하지 않습니다. 당세만, 육이 살아 있을 때만 귀할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 자기 몸>을 가지고 <자기 영>을 영원한 나라에 가서 살게 만들 수 있으니, <자기 몸과 생각>이 그리도 귀하고 중합니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는 <인간의 육>을 통해 <그 영>을 만들어 구원하고 휴거시켜 영원히 살게 하는 일을 ‘구원자’를 통해 행하십니다. 고로 <자기 생각과 육>이 그리도 귀하고, 자기를 영원히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구원자>가 그리도 중하고 귀합니다. <순간의 것>은 <영원한 것>을 절대 못 따라갑니다.

<흙>을 가지고 ‘농사지어 먹고 사는 것’은 보통으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더 귀한 것을 깨닫고 <흙>으로 ‘100억, 300억짜리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쓰면, 그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납니다. 이와 같이 <자기 육신>을 가지고 ‘인생 사는 데’만 쓰지 않고 <자기 영>을 구원하고 휴거시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면, <그 몸과 생각>을 수조 배 더 귀하게 쓰게 됩니다.  자기는 볼 만한 것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세도 없고, 재물도 없고, 인물도 없다고 가치 없게 여기지 말아요. 이 시대 전능자의 말씀을 듣고 휴거만 됐다면 천하에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그 영은 ‘영원히 존귀한 영’이 되고, 그에 따라 그 육도 ‘천하에 귀한 육’이 됩니다.  인간으로 이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의 차원, 깨닫는 차원’을 높이고, 그로 인해 ‘행실의 차원’을 높여 두루두루 행함으 <차원>을 몇 단계씩 쑥 높이기를 축복합니다.

 

<2016년 1월 13일 정명석 목사의 수요말씀 中>

내용 더 보기

jms 정명석 총재 설교 – 사랑과 감사 / 마태복음 25장 14-21절

정명석 총재 목사 수요 설교

jms 정명석 총재 2015년 12월 30일 수요 설교 :
사랑과 감사  / 마태복음 25장 14-21절

 

할렐루야!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의 말씀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소질과 재질대로 달란트를 나누어주었다고 예수님이 비유했습니다. 주인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는 “참 잘했다.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구나. 바로 가서 하였구나. 바로 가서 장사함으로 이렇게 되었구나. 너는 나와 같이 기쁨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자. 참 잘하고 충성하였다. 작은 일이긴 하지만 충성하였구나.”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도 “수고했다. 재질과 소질들을 열심히 발휘해서 또 달란트를 남기었구나. 잘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자.”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왜 한 달란트 갖고 왔는고 하니, “주인은 이럴 줄 알고 내가 이렇게 대했습니다.” “너는 나를 오해했구나. 나는 수고도 안 하고 애씀도 안 하고 모으지도 않고 생기는 줄로 생각했어? 나도 남기기를 원하는 사람이고, 잘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며 커지기를 원하는 사람인데… 나를 오해하였도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통하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받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는 너의 행위대로 바깥에 나가서 바깥세상에서 살아라.” 그랬습니다. 이래서 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이 이야기로 인해서 금년도 우리를 회고합니다.

한 해를 회고해 보면 여러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개인, 가정, 민족, 세계적으로 볼 때 각 나라들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깨달은 일들, 겪은 일들을 보면 보람 있는 일도 많았고, 너무 바빴고,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 눈물겨운 것도 많이 있었고, 앞이 캄캄할 때도 있었고, 그리고 또 태양같이 눈부시게 찬란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개인, 가정, 민족, 세계를 하나님이 철저히 지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 모든 고통 속에서 하마터면 크나큰 함정에 빠져서 그저 고생들을 엄청나게 했을 것인데 그런 세계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셨고, 동행해 주셨습니다.

서산마루까지 우리를 비추는 태양처럼 지키시고 영의 능력으로 동행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지켜주셨습니다. “성경말씀은 항상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지켜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한 말은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기도하고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러하겠다.” 하고 마음으로 깨달음이 오면 지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 좋은 것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은 실수를 않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를 많이 하는데 하나님은 실수를 않고 하니까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기술자들도 실수하고 전문가들도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수를 안 하시니까 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 놓고 맡겨놔도 하나님은 한 번도 실수를 안 하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또 한 사람에 천사들 다섯 명, 여섯 명씩 배치시켜 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도 살피시니까 실수를 안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무조건 하나님은 여러 가지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 주는 것을 따라서 그전에 실수한 것을 다시 복직하고 또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실수해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용납하시고 함께하시고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언제? 과거 1년 동안 그렇게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1년을 두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 지혜를 주고 지식을 주고 부지런함을 주고 힘든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함께해서 일어나게 만들고 뛰게 만들고 이런 일들을 계속 암암리에 역사를 은밀히 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365일 동안 존재하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1년을 하루같이 이렇게 보냈습니다.

태양이 지듯이. 서산마루에 태양이 지금 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가 매일 겪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1년 치를 크게, 365일치의 큰 해가 지금 지는 날입니다. 1년 동안 여러분들, 아주 수고하고 참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함께하심이 컸다는 것을 일일이 보고 겪었기 때문에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고 겪은 것을 깨닫고 말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고하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벗어나 가나안 복지를 가게 되었을 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홍해 바다의 죽음의 고비를 건너왔을 때를 돌아봐라. 어떤 곳에서 이끌어냈나. 어떻게 왔지?” 자기들이 홍해 바다 물을 가른 것도 아니고 물을 말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 못한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해 주셨고 인간이 한 것도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하게끔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고 계셨더라는 것입니다.

올 한해 건강을 지켜주시고, 여러 사고 나는 곳에서 지켜주시고, 배고프지 않게 먹여 주시고, 연속적으로 말씀을 듣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환난과 역경 중에도 늘 사랑하면서 해 왔고, 감사하면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금년도는 사랑과 감사의 해로 매듭을 짓게 되었습니다. 금년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심이 심히 크고 많았던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세계 각 나라, 각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뛰고 달리면서 젊음을 또 한 해에 묻고 가는 여러분들, 오늘 주일말씀과 같이 “잘 했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으로 또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같이 참여해서 또 살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 그동안 수고했어요. 이제 다음 만나는 새로운 해에 또 멋있게 맞고, 뛰고 달리면서 손을 잡고 한 해를 또 맞고 가기를 바랍니다. 온 세계의 여러분들, 모두 모두 어려운 환경을 이기면서 담대하게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2015년 12월 30일 정명석 목사의 주일말씀 中>

내용 더 보기

jms 정명석 총재 설교 – 여러 가지 형상을 갖춰야 아름답고 신비하다 차원을 높이는 방법 / 마태복음 11장 29-30절

jms 정명석 총재 2016년 1월 10일 주일 설교 :
여러 가지 형상을 갖춰야 아름답고 신비하다. 차원을 높이는 방법 / 마태복음 11장 29-30절

 

할렐루야!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의 평강을 빕니다. 성령님은 ‘여러 가지 모양과 형상’으로 나타나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성령님의 역사도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하고 웅장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역사하심이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모습, 말씀대로 행하며 노력하는 모습, 참고 견디며 이기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답습니다. 환난·핍박·어려움이 몰려와도 끝까지 주를 따르며 주와 함께 행하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답습니다. 새벽을 깨워 삼위와 주와 소통하고 대화하고자 몸부림치며 행하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답습니다. 생명을 살리고자 희생하는 모습이 그리도 아름답습니다. 인격을 갖추고 좋은 말과 행실로 생명을 대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삼위를 사랑하며 살고자 행하는 그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믿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던 자가 시대를 깨닫고 뒤집어져 행하는 그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안 하겠다고 하던 자가 성령의 감동과 이끌림을 받아 다시 주의 뜻대로 행하는 그 모습이 참 감동적이고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단순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과 생각과 혼과 영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신비하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신비한 미의 여신이 그 모습답게 ‘여러 가지 형상’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역시 ‘성령님’이십니다.

여러 가지 형상을 갖추고 있으면 아름답고,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나면 그리도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갖출수록 그리도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그 육도 삶도 아름답고 신비하고, 그로 인해 변화된 영도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모두 현재 위치에서 ‘차원’을 높여야 됩니다. 한 가지씩 행하면서, 두루두루 갖추며 차원을 높여야 됩니다. 삼위일체와 주의 형상을 많이 닮도록 차원을 높여야 됩니다.

차원을 높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곧 ‘평소’대로 안 하고, 더 ‘힘’을 내고 ‘열심’을 내서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물건을 들 때도 ‘보통’으로 드는 것과 그보다 ‘힘’을 내서 드는 것은 그 차원이 비교가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더 ‘열심’을 내서 하면, 차원이 높아집니다.

만사의 어떤 일이든 차원을 높이려면, 더 ‘힘’을 내고 ‘열심’을 내면 됩니다. 사람은 힘을 낼수록 힘이 나고, 열심을 낼수록 열심히 하게 됩니다. 문제는 ‘하고자 하느냐, 하기 싫어하느냐’입니다.

차원을 높이는 것은 마치 ‘급경사로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올라갈 때는 경사가 심해서 힘이 들지만, 올라가서 보면 ‘평지’입니다. 고로 올라갈 때, 차원을 높일 때만 더 ‘힘’을 내면 됩니다. 올라가서 그 차원으로 가면 ‘평지’와 같아서 그때부터는 그렇게 ‘힘’을 안 내도 됩니다. 고로 높이 오를 때, 차원을 높일 때 그때 최선을 다하기입니다. 여러분 각자 부족한 것, 차원 높일 것, 자기가 행할 것들이 있습니다. 힘을 내고 열심을 내야 됩니다.

사람이 산을 오를 때도 그렇게 ‘힘’이 듭니다. 급경사, 오르막길이 나올수록 더 ‘힘’을 내서 올라야 됩니다. 그때는 ‘평지’를 걷듯이 산을 타면,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산 정상에 오르면, 더 이상 ‘급경사’도 없고 ‘오르막길’도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자기 수고를 칭찬하며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맛에 산을 탑니다.

기도, 전도, 감사 생활, 삼위와의 소통, 주와 일체의 삶, 생각, 행실, 말투, 성격, 인격 등 신앙의 차원을 높이는 것도 그러합니다. 2단, 3단, 4단으로 차원을 높일수록 더 ‘힘’을 내야 됩니다. 그런데 차원을 높일 때 그때가 그리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막상 차원을 높여서 ‘그다음 차원’으로 가면, 그때부터는 그렇게 힘이 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쭉~ 열심히 하다가 항상 ‘마지막 선’에서 낙심하고 포기합니다. 그 차원의 마지막은 ‘제일 급경사’이고 ‘오르막길’입니다. 그때 낙심하지 말고 더 힘을 내서 오르면 올라가집니다. 그런데 그때! 힘들다며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니 ‘수고한 것’이 헛되고, ‘수고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전도할 때도, 기타 신앙의 어떤 일을 할 때 쭉~ 참고 이기며 열심히 하다가 끝에 가서 ‘마지막 오르막길’을 오르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그때는 더욱 힘을 내서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도 부르고, 지도자도 부르고, 도와줄 자도 부르고, 자기도 더 힘을 내면서 끝까지 올라야 됩니다. 끝까지 올라야 됩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됩니다! 그 한계를 넘어서야 됩니다! 그러면 ‘다음 차원’으로 갑니다. 맨 끝이 제일 힘들지만 그 ‘오르막길’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평지’처럼 편안하고 수고의 대가도 받고 누리게 됩니다.

“올라갈 때만 힘이 들지, 힘들여 올라가고 나면 거기서부터는 ‘평지’와 같아서 안 힘들다.” 이 말을 꼭 명심하고, 잊지 말고 늘 뇌 속에 품고 다니며 행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이 하나님이 되고, 성령님이 되고, 성자 주가 되고 ​돕는 자가 되어 함께 행해 줄 것입니다. ​

 

<2016년 1월 10일 정명석 목사의 주일말씀 中>

내용 더 보기